[팩트신문 = 이상혁 기자]
영화 ‘암살자들’을 두고 더 이상 창작의 자유라는 방패 뒤에 숨을 필요가 없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이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을 가져와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뒤섞었다. 문제는 그 상상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얼마든지 다를수 있다. 유신과 장기집권도 비판할수 있다. 그러나 비판에는 사실이 있어야 한다.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을 가져와 확인되지 않은 의혹과 극적 설정을 뒤섞고 관객에게 역사적 사실처럼 각인될 여지를 남겼다면 단순한 영화적 상상력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묘사는 대한민국 영화가 아니라 적국의 선전영화를 연상시킬 만큼 일방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소재로 대한민국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라면 최소한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한 책임은 있어야 한다.
육영수 여사는 실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피해자다.
그 죽음은 영화적 흥미를 위해 마음껏 비틀어도 되는 소재가 아니다. 한 인간의 죽음이고 한 가족의 비극이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실제 사건이다.
그런 비극을 가져와 의혹과 상상력을 덧씌웠다면 감독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낼 수도 없다.
각본을 쓴 사람, 기획한 사람, 제작한 사람, 투자와 배급 과정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던 관계자들 역시 자신들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내놓았는지 책임 있게 설명해야 한다.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동안 수많은 검토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고민한 사람이 없었는지 의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나 반론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명예를 어디까지 영화적 상상력으로 소비할수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예술이라고 해서 치외법권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 역시 무제한의 권리가 아니다.
법적으로 문제가 될 부분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고발과 법률적 검토가 이뤄지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고, 법적 책임이 인정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면 된다.
감독이든 제작진이든 예술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적 판단에서 특별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려면 실제 기록으로 비판하면 된다.
유신을 비판하려면 당시 제도와 인권 문제를 다루면 된다.
독재를 비판하는데 영화적 조작이나 확인되지 않은 의혹은 필요하지 않다. 역사적 기록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굳이 육영수 여사의 죽음까지 끌어들여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의혹의 중심에 세웠다면 그것은 예술적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죽은 사람은 반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살아 있는 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반세기 전 죽은 사람을 불러내 상상력으로 난도질하는데 무슨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가.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는 역사와 국민이 평가하면 된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 역시 확인된 사실과 기록을 토대로 다뤄야 한다.
영화감독의 상상력이 역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영부인을 주적국의 선전물에서나 볼 법한 시각으로 그려놓고 예술과 창작이라는 말로 모든 비판을 피해가려 한다면 국민들이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창작의 자유가 있다면 비판의 자유도 있다.
표현할 자유가 있다면 그 표현에 책임을 요구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
사실이라면 근거를 제시하면 된다.
허구라면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법적 책임을 따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고발과 사법적 판단도 피할 이유가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래서 창작자의 책임은 오히려 더 무거워야 한다.
역사를 난도질한 칼에 예술이라는 이름을 새긴다고 그 칼날까지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남긴 가장 씁쓸한 장면은 스크린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과 고인을 이런 방식으로 소비하고도 예술이라는 이름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그 인식 자체가 더 섬뜩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