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회의원(구미시 갑) 심학봉 칼럼]
2002년 초, 구미시 투자통상과 H과장과 계장이 과천 산업자원부 디지털전자과로 찾아왔다. 전자공고 동문을 수소문해서 기술고시에 합격하고 공무원으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고 했다.
사실 필자는 1981년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구미를 철저히 외면하고 살았다. 아침 6시 점호, 애국가 4절까지 제창, 운동장 5바퀴 구보, 밤 10시 점호까지, 3년 내내 이어진 17살 소년병 같은 기숙사 생활이 싫었고, 힘든 학교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동기 2명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명절에 고향 포항을 가기 위해 구미를 지날 때면 고개를 돌리고 갔던, 그런 미움의 도시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와줄 것도 없고 도와줄 마음도 없으니 돌아가시라고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몇 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뜨지 않고 끈질기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지역산업 발전을 위해 대구(섬유산업), 부산(신발산업), 광주(광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었고, 경북 지역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산자부가 KDI에 가칭 '구미연구단지 조성에 관한 타당성 용역'을 의뢰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구미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초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물으니, KDI 연구용역 초안에는 구미연구단지를 4공단에 10만 평으로 조성하되, 5만 평은 국비로, 나머지 5만 평은 구미시 융자로 추진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재정 여력이 부족한 구미시(당시 구미시장 김관용)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이었고, 인프라 사업 특성상 수익이 발생하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구조여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듣고 이후 수차례 회의를 통해 구미시의 재정 상황과 조성계획, 입주계획 등을 협의한 결과 구미시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경북도청에서 행정부지사 주재로 KDI 연구용역 최종 발표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KDI 담당 박사에게 구미연구단지 재원 구조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설득했지만, 담당 박사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렇다면 오늘부터 KDI는 구미연구단지 조성계획 연구용역에서 손을 떼고, 보고서 등 일체의 자료를 산자부 디지털전자과로 이관할 것을 요청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예산처 동기 등 관계 부처 인맥을 동원하여 협의한 결과, 구미시 부담분 5만 평도 국비로 조성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구미시 담당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관계 부처의 협력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후 H과장과 계장이 '구미연구단지'라는 명칭이 너무 포괄적이니 적당한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고심 끝에 구미전자정보기술단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구미 4공단은 지정(1996년 4월)과 기공(1999년 5월)을 거쳐 준공(2011년)까지 15년이 걸려 205만 평 규모로 완성되었고, 구미전자정보기술단지는 기공(2005년 6월) 이후 868억 원을 투입하여 2006년에 건축공사를 완료하였다.
단지가 완성되어 가면서 핵심 시설인 연구기관을 어떻게 설립할지가 또 다른 과제였다. 당시 구미에는 한국기술연구원이 전자통신연구원으로 통합되면서 대전으로 이전한 후 변변한 연구기관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준비 단계로 전자부품연구원(현 전자기술연구원, 성남 소재)의 구미 분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초대 소장은 전자부품연구원 이철동 박사로, 경북대학교 전자과 선배였다. 분원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구미전자정보기술단지 조성과 장비 도입, 지원시설 운영 체제를 담당했다. 2007년 구미전자정보기술단지가 준공되면서 ‘구미전자정보기술원(GERI)’이 독립적 재단법인으로 설립되었고, 구미 분원의 기능과 인프라 전체가 GERI로 이관되었다.
이러한 성과가 쌓인 끝에, 2008년 3월 17일 이명박 대통령의 지식경제부 업무보고가 바로 이곳 구미전자정보기술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5공단 조성이 결정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앞선 글(7월 1일자, '5공단의 역사와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에서 이미 기록한 바 있다.
현재 구미전자정보기술단지 10만 평에는 구미전자정보기술원 본원, 구미코, 그리고 포항로봇융합연구원 분원 형태의 지능형로봇연구소 등 기업지원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구미전자정보기술원은 최고 수준의 연구 인력과 연구 인프라를 보유한 명실상부한 연구기관으로 성장했다.
이제 구미의 미래를 위해 구미전자정보기술원의 기능과 역할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첫째, 지배구조의 재정립이다. 구미전자정보기술원이 구미시에 산재한 연구 기능을 종합적으로 기획하고 조정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현재 국책 프로젝트들이 각 사업단 형태로 분산 운영되다 보니 기관 간 연계와 시너지 효과가 약한 것이 현실이다. 포항테크노파크 등을 벤치마킹하여 중앙부처 관련 법률에 법인 성격을 제도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 대형 국가 R&D 프로젝트의 주도적 기획과 추진이다. 금오공대, 지역 기업 등과 사전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서울대, 카이스트 등 주요 대학과 협력하여 산업부·과기부 등의 R&D 과제를 수행하고, 그 결과물을 신산업으로 키워야 구미 재도약의 기반이 마련된다. 씨앗을 만들고, 묘목으로 키우고, 공단에서 양산하는 구조. 이것이 지속 가능하고 고유한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다. 대형 국가 연구과제 수주는 전국의 우수 연구 인력을 구미로 끌어들이는 계기도 된다. 다만 재정이 열악한 구미시의 매칭 부담이 과도한 R&D 인프라 사업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시설 이용자가 전국에 산재해 있는 경우 구미 지역에 미치는 실질적 경제 효과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2002년 봄, 과천 청사 복도에서 끈질기게 붙잡던 두 공무원의 열정이 없었다면, 구미전자정보기술단지도 구미전자정보기술원도 없었을 것이다. 그 열정이 오늘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제 그 토대 위에서 구미가 다시 도약할 차례다.











